비틀

우리 삶과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이슈를 사유하고 질문을 건넵니다.

멈춤에 대한 희망 –
깨어나기 위한 질문

전환의 시대를 건너는 예술교육

멈추면 무엇이 보일까? 티베트어로 드렌파(drenpa)는 ‘대상이나 조건, 상황을 자각하다. 또는 깨어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를 발견하는 대신 살아있는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각이나 깨어있음이 가능하려면 기억하고 돌아보기를 위한 자발적 멈춤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그리고 원하지 않는 ‘멈춤’의 상황에 서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전 지구적 멈춤이 진행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역설들이 감지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이 멈추자 도시의 공기는 깨끗해졌고, 감시가 느슨해진 틈으로 아마존의 숲은 망가져 가고 있다. 유럽연합은 흔들리고 있고,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답을 찾는다

학교에 뿌리내리는 문화예술교육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노래’라는 예술은 대부분의 사람이 보편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문화 중의 하나이며,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이다.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청소할 때도 과제를 하면서도, 심지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가락을 흥얼거리곤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생활에 노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실려 있는 노래는 수업 시간에만 부르는 게 되어 버렸고, TV나 유튜브를 통해 아이들 삶 속에 파고든 대중가요가

아이들에게 침윤의 시간을 허하라

학교와 교육, 그 안에서의 예술

라면과 수필 감히 말하건대, 유기농법은 풀과의 전쟁이고, 기숙형 대안학교는 라면과의 전투다. 아이들이 생활관 규칙을 새로 개정해 나가던 2019년 어느 틈새에 야식 규정이 느슨해진 때가 있었다. 매일 밤 11시 생활관 건물 전체는 라면 스프 냄새가 진동했다. 일부 아이들과 교사회 전체는 ‘이건 아니지 않냐’는 정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103명의 학생과 스무 명 넘는 교사가 한자리에 모인 ‘가족회의.’ 나는 강당 무대에 걸터앉아 아래와 같은 대목 한 구절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걸 알면서도 라면을 먹으면서 김밥을 또 주문하니. 슬프다, 시장기의 근원은 어디에

보고 보여주고 보이는,
모호함 사이를 헤아리기

‘봄’의 예술적 의미를 새로-봄

우리는 이제 개별자로서 한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한 사람에는 여성과 남성, 건강하고 젊은 사람부터 노약자까지,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여기는 사람부터 사회적 약자까지 그리고 어른과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약점과 모자람이 ‘차이’로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화의 기반이 되어 줄 예술 행위와 그 결과에서도 이런 ‘차이’가 공존하고 드러나야 한다는 어떤 당위를 우리는 어떻게든 의식하여야 한다. 이런 태도는 결코 지공무사(至公無私)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 우리는 새로이 변화된 ‘차이’ 존중의 문화에서 특별히

방방곡곡 소외 없는
문화권리를 위하여

농산어촌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조건

10여 년간 대구의 마을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에 종사하다 시골살이 한 지 3년이다. 도시 활동가의 시선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지난날 필자의 활동과 요즘 시골 동네의 현실이 중첩되면서 드는 묘한 감정과 조건에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민이 점차 깊어진다. 지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집장가 가고 아들딸 낳고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을 성실히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농촌의 현실이 자기들의 책임인 양 누구에게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저 배우지 못하고 도회지로 나가지 못한

어제의 나에게 묻는다

사는 힘의 본질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는 것의 미학 일본이 낳은 전설적인 음악가 오타키 에이치(大瀧詠一)의 생전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찾아온 손님들은 일단 예외 없이 스튜디오에 있는 막대한 레코드 컬렉션을 보고 “도대체 레코드가 몇 장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타키 에이치는 그런 질문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질문에 대답해도 오타키의 음악성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레코드는 10만 장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도 “와, 그렇군요. 굉장하군요”하고 끝난다. 유명한 화가에게 “캔버스 1장을 몇 분 만에 그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하루에 최대 몇

갱신의 예술 활동-비로소 살아있는 움직임, 살게 하는 움직임

삶을 전환하는 예술

생애 전환기 혹은 인생의 후반기에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이 괜히 복잡하기도 하고, 배울 만큼 배우면서 살아온 입장에서 또 교육을 받는 것도 지겨울 테니 간단히 ‘예술 활동’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터이다. 예술 활동으로 줄여 놓고 보니 예술 + 활동의 합성구조가 드러나면서 ‘활동’의 의미가 새삼 궁금해진다. 사전을 찾아보니 ①일정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떤 일을 활발히 함 ②사람이나 동물이 몸이나 내부 기관

농촌, 똥 그리고 근본회귀

생명의 근원과 삶의 근본을 깨우치기

『죽음과 희롱하는 사나이들』이라는 미국소설이 있다. 이 작품은 소설가 G. 시드니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 해병 장교로 참전한 후 돌아가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자서전적 소설이다.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을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시드니는 머리말에서 “한국인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많이 불쾌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덜도 더도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쓰겠다”라고 전제하고 있다. 이 작가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비행기 트랩을 내리면서 맡은 은은한 똥냄새로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농사는 인분이 원천이었다. 시골 집집마다 똥구덩이

문화예술교육, 도전과 과제는 현재진행형

2019년 문화예술교육 결산과 2020년 키워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문화예술교육자로서, 행정가로서, 연구자로서, 또 다른 역할로,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던 한 해를 돌아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도전과 성취, 아쉬움은 무엇일까? 각자의 다이어리와 업무수첩에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눈에 띄게 등장했던 단어나 문장은 어떤 것일까? 동료들과 가장 많이 공감하고 논쟁하고 톺아보았던 화제는 무엇이었을까? [아르떼365]에서 필자로, 인터뷰이로 만났던 분들과 함께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수많은 이슈와 사건이 가득했던 2019년을 결산하는 의미로 문화예술(교육)계가 주목했던 주요 이슈를 꼽아보고 2020년 새롭게 도전해야 할 과제와

우리 말의 오늘과 삶의 풍경을 모으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가는 겨레말큰사전

1999년 겨울 금강산에 갔었으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관광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북측 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에 갔었는데, 항해 시간이 꽤 길었다. 금강산호텔에서 행사를 끝내고 구룡폭포로 관광을 나섰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북측의 안내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 중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가슴에 차고 있는 내 이름표에 관심을 가졌다. “선생께서는 통일맞이 문익환기념사업에서 나왔구만요?” “통일맞이를 아세요?” “그럼 알지요. 문익환 목사님은 수령님을 만나신 통일의 선구자 아니십네까?” “아이쿠 정말 반갑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온정리에서 왔습네다. 내일

누구도 외롭지 않은 도시를 위하여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 수립과 지속가능발전목표의 문화적 실천

부끄럽지만 이 지면을 빌어 고백한다. 광역문화재단 입사 8년 차 직원이지만 아직도 문화예술정책에서 자주 회자되는 언어들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지역성, 자생력, 선순환 구조’ 등의 언어는 내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삶에서 홀연히 떠 있는 것 같고, 내 직장이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 친척들의 질문에 한 번도 속 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 수립 집필을 담당하면서 가장 큰 고민이 어떻게든 붕 떠 있는 문화예술의 정책 언어들을 시민에게, 아니 적어도 내 동료들에게라도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바꿀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정말 거기에 당사자의 목소리가 있는가

장애와 예술, 포용의 방식

경북의 한 특수학교에서 학생들이 무형문화재인 하회 별신굿을 배우기로 했다. 발달장애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나는 여기에 컨설턴트로 참여하였는데 별신굿의 내용 중 이매마당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였다. 등장인물 ‘이매’는 비틀거리는 몸짓과 어눌한 말투로 관객을 웃기고 양반을 희롱한다. 그 행색과 말투로 비추어 볼 때 뇌병변과 지적장애를 가진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담당 교사는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자칫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것으로 비춰질까봐, 게다가 그것을 그런 발달장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특히 학부모들이 불편할까 걱정을 하였다. 한 학기쯤 지나고 학교를 방문하니 예술강사들이

혐오의 시대, 당신의 다양성은 안녕하신가요?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으로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가진 정치적 지향성이 어떻든지, 어떤 취미와 사회적 위치를 가졌든지 상관없이 사회 모든 구성원의 공통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의 갈등과 혐오 그리고 차별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점점 더 훼손되고 조롱당하는 나와 당신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길은 없는 것일까? 2018년 전 세계를 대상으로 BBC의 글로벌 서베이(Global Survey)가 진행되었다. “당신은 당신과 배경, 문화,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관용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한국은 전 세계 조사 대상국 중 뒤에서 두 번째를 했다. 많은

도전과 실패에 대한 격려로서의 예술교육을 기대하다

[좌담] 청년 예술가가 말하는 대학 예술교육과 예술가의 미래

웹진 [아르떼365]는 10월 전문인력과 예술대학, 예술가의 역할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좌담은 대학 예술교육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예술가의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좌담 개요 • 일 시 : 2019년 10월 10일(목) • 장 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11층 A.Library • 좌 장 : 정원철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 참석자 : 이가은(연극과 졸업, 문화예술기획자), 이용석(작곡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재학), 이현만(판화과 졸업, 문화예술교육자) 대학 예술교육의 문제점 정원철 : 예술대학이 이대로

현실에 발붙인 철학과 실천,
노동의 가치

차세대 예술 종사자에 필요한 교육

사실 ‘교육’은 예술가를 양성할 수 없다.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는 필요 없다. 진정한 예술은 안락한 책걸상이 아닌 땀내 풍기는 삶의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참 많은 문장을 쓰고, 지웠다. ‘대학’ ‘예술’ ‘교육’ 각각의 단어만으로도 할 말이 참 많은데, 이들이 뒤엉켜 있으니 참 난감하다. 예술대학이 커리큘럼을 개선하면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대학 교육으로 예술가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틀렸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와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대학은 우리 사회의 차세대를 양성한다. 예술대학은 ‘예술계’ 차세대를 양성하는 보고다. 이제

감각과 기술을 넘어,
사유의 능력을 기르도록

예술가를 위한 미술교육의 미래

대학에서 20여 년 교육을 해왔지만 미술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미술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급속한 변화 속에 있고 끊임없는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의 자율성이나 예술교육의 특수성을 내세우는 방어논리가 무색할 만큼 사회 구조가 바뀌고 미술의 역할 자체가 변하는 상황에서 미술교육의 미래에 대한 진단은 자칫 공허한 당위론에 그치기 쉽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 미술교육의 내일을 생각해본다. 1995년에 필자는 작가 박이소와 한국의 미술교육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각각 독일과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던 우리는 그 무렵 한국